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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음악

admin2019.11.06 11:09조회 수 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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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전곡> 

 

‘바로크’라는 말은 본래 16세기 르네상스 다음에 나타난 양식에 대한 모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 이상, 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고, 예술 양식화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바로크는 절대 왕권과 함께 발전하고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종교 개혁을 이루어 낸 독일에서는 자국의 코랄을 바탕으로 한 독일풍의 바로크 음악을 구축해 나갔다. 

 

1. 바로크 시대의 유럽
17세기 유럽에는 교황권과 지방 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쇠퇴하고 강력한 왕정의 시대가 도래한다. 바로크의 시기는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로,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민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로 본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강화 조약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은 2,000여 개의 작은 국가로 분열되었다. 17세기 유럽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 교회와 국가, 중소 봉건지주와 왕권의 싸움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과학적·철학적 탐구가 더욱 꽃피었으며, 미술과 연극도 발전하였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물을 접하게 됨으로써 세계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발견한 지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과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절대 왕정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루이 14세 사후(1715)부터 빈 회의가 개최될 때(1815)까지 1세기 동안의 유럽은 근대적 특징을 가진 혁명의 시기를 겪게 된다. 정치·사회적으로는 프랑스 혁명(1789)과 같은 시민 혁명이 일어나 절대주의 군주 체제를 타도하고 근대 시민 사회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진행된 산업 혁명은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정치·문화 생활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는 절대 왕정과 함께 시작하고 그 권력의 쇠퇴와 함께 저물어 갔다. 18세기 말에는 여성적이고 우아함을 추구하는 로코코 문화 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2. 바로크 시대 음악의 특징
바로크 음악에는 두 가지 양식이 공존했는데, 첫 번째는 르네상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네덜란드 양식의 대위적인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양식이었고, 두 번째는 가사가 음악을 지배하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음악으로 이들의 화성적인 양식은 화려한 오페라로 꽃피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나 보다 프랑스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오페라 발레를 추구했다.
독일은 일찍이 민중들의 마음을 꿰뚫고 이루어 낸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독일 고유의 코랄을 바탕으로 한 개신교 교회 음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바로크 시대를 휩쓸었던 오페라의 영향은 종교 음악으로까지 파급되어 오라토리오(oratorio)·수난곡(passion) 등의 종교적 극음악도 생겨났다.
한편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귀족들을 위한 극도의 장엄함과 사치스러움에 반기를 든 서민들을 위한 오페라가 탄생하였다. 

 

3.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이탈리아의 바로크 음악은 모노디에 의해 발전한 오페라와 다양한 양식의 기악 음악이 대표적이다. 많은 작곡가들 중에서도, 오페라의 중심에는 몬테베르디가 있었으며, 그의 오페라 형식은 바로크 시대 유럽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1) 오페라의 전조
오페라의 탄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의 조반니 데 바르디 공작(Count Giovanni de´ Bardi; 1534~1612)과 몬테베르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르디 공작의 집에서 열렸던 카메라타(Camerata)라는 모임에서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디 공작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사람으로, 자신의 집을 피렌체의 시인, 음악가, 학자들에게 개방해서 사적인 모임을 만들고 연구·토론하였다. 이 모임은 1573년부터 1587년까지 비정기적으로 모여 고대 그리스 음악을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에 대해 연구했다. 이들은 에토스(ethos)를 연구하며 고대 그리스 음악이 가진 힘을 복원하려고 노력하였고, 회원들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가장 중요한 형식을 ‘단선율’로 파악했으며 이들의 다각적인 노력은 모노디(monody; 단선율 음악)를 탄생시켰다.
음악적으로 모노디 선율은 가사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르는 음악적인 낭송이었는데 카치니(Giulio Caccini)는 모노디 양식을 발전시켜서 바로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인 통주저음(通奏低音; basso continuo) 기법의 반주법을 확립하였다. 통주저음은 건반 악기에 사용되었는데, 당시의 불필요한 장식 음형을 정리하고 폴리포니 양식의 복잡한 대위법 양식 대신 화성 진행의 골격만을 주어진 베이스 옆에 숫자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숫자는 기본적인 약속을 지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좋은 연주를 위해서는 지시된 숫자에서 벗어나 가장 잘 어울리는 연주 형태를 늘 연구해야 했다.
모노디 음악은 17세기 초의 세속 음악과 종교 음악을 망라한 모든 음악에 급속도로 침투하여, 1598년에는 사실상 세계 최초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모노디 양식의 ‘다프네(Daphne; 1957)’의 상연에 영향을 주었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음악 활동은 곧 오페라 발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몬테베르디는 소수 귀족들의 음악이던 오페라가 일반 대중 극장 공연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인테르메디오(intermedio)는 피렌체에서 발전한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공연 형식으로서 오페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테르메디오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몇 개가 한꺼번에 상영되기도 하고, 용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연극의 막간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이고 화려한 인테르메디오는 1589년 메디치 가의 혼례를 축하하는 행사에서 공연된 ‘라 펠레그리나(순례의 여인)’였는데, 오페라의 탄생을 예고한 이 공연의 기획자는 카메라타의 중심이었던 바르디 공작이었다.
인테르메디오가 오페라와 다른 점은 작품 전체가 몇 개의 가곡이나 기악곡으로 나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내용이 있는 긴 이야기를 음악화하기 위해서는 등장인물들이 자유로이 대사를 주고받아야 했고, 이를 위한 새로운 작곡 기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후 중기 이탈리아 오페라 시기에는 레시터티브(recitative)가 탄생하게 되었다.
(2) 본격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시대
  (가) 초기 오페라와 만투아 궁중: 최초의 오페라는 피렌체의 야코포 페리(1561~1633)가 작곡한 ‘다프네’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초기 오페라는 몬테베르디(1567~1643)에 의하여 만투아에서 시작되었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음악가로서, 그가 저술한 아홉 권의 마드리갈
곡집을 보면 오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였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606년부터 1607년에 걸쳐 오페라 ‘오르페오(L’Orfeo, fevola in musica)’를 작곡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다양성과 음색을 위해 서곡과 간주곡에 해당되는 기악적 부분을 편성하였으며, 가사를 민감하게 취급하면서 표현력이 풍부한 선율을 작곡하였다.
몬테베르디는 이듬해 두 번째 오페라 ‘아리아드네(L’Ariadne)’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아리아드네의 라멘트는 그의 마드리갈 6집에 수록되어 있다. 라멘트는 탄식이라는 뜻의 슬픈 노래를 말하는데, 매우 인기가 높아 다른 작곡가들도 경쟁적으로 라멘트를 만들었다. 이후 베네치아의 오페라에서도 라멘트를 반드시 넣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한편, 종교 음악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는 합창 중심의 코러스 오페라가 탄생했으며, 아리오소(arioso)라고 하는 ‘아리아와 레시터티브 중간’에 해당하는 짧고 서정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로마의 오페라는 만투아의 오페라에 비해 더욱 화려하고 규모가 컸다.
  (나) 바로크 중기 오페라의 중심-베네치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바로크 중기의 오페라는 솔로 가수의 노래를 중시하게 되었고, 오페라 전용 극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아리오소를 통해 아리아와 레시터티브의 분리가 일어났고, 기계의 발달로 인해 무대 장치는 거대하고 화려해졌다. 당시의 무대는 공간적 깊이감을 가지고 있어서 천상과 지상, 지하의 일들을 모두 실감나게 표현했다.
1631년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독특한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상업과 무역 활동에 기반하여 공화제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족을 칭송하는 궁중 음악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지만, 대신 세속 음악과 오락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 음악의 발전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문예 애호가들로 구성된 여러 개의 ‘아카데미아’였다.
몬테베르디의 음악 중 제일 처음 베네치아에서 공연된 것은 장대한 대화식 마드리갈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Combattimento di Tancreidi et Clorinda; 1624)’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음악으로 말발굽 소리, 전투의 나팔 소리, 두 전사가 겨루는 모습,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등을 선명하게 묘사하였으며, 전사의 심리 상황 등을 음악으로 모방·실험함으로써 몬테베르디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몬테베르디가 이 작품에서 ‘스틸레 콘치타토(흥분 양식)’기법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이윽고 베네치아에 오페라를 대중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최초의 상업 극장이 생겨났다. 베네치아 최초의 대중 극장 오페라 ‘안드로메다(Andromeda;1637)’는 화려한 의상과 무대 효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치밀한 무대 장치를 이용하여 구름을 타고 남녀 배우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무대 조명도 겨우 촛불을 이용했을 뿐이지만 물감을 풀어 놓은 유리그릇에 빛을 통과시키거나 반사경을 이용해서 놀라운 효과를 거뒀다.
‘포페아의 대관(L’Incoronazione di Poppea)’은 몬테베르디의 베네치아 시대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642년에 초연되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오페라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첫째로, 이 작품은 기존의 오페라처럼 신화에 기초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했다. 둘째로, 화려한 볼거리로서 무대 효과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극의 논리적 구조에도 신경을 썼다. 우스꽝스러운 병사 두 명이 등장해서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기도 하고, 비련의 라멘트에 이어 늙은 유모의 희극적인 대사를 넣기도 한 것이다.
몬테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포페아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매혹적인 레시터티브와 아리오소를 자유자재로 배합하여 작품을 구성하였다. 이 때문에 연주자는 템포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장식음을 넣는 것도 가능했다. 성악 연주자의 즉흥적인 기교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 바로크 말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 나폴리: 바로크 말기에는 오페라의 중심지가 나폴리로 옮겨 갔다. 1653년에 상설 오페라 전용 극장이 문을 열었고, 1680년 이후에는 나폴리 특유의 오페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프로벤잘레에 의해 시도된 ‘다 카포 아리아(da capo aria)’는 곧 나폴리 오페라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7세기 말의 나폴리 오페라에서는 두 종류의 레시터티브가 등장했는데, 하나는 화성만을 쳄발로로 반주해 주는 ‘레치타티보 세코(recitativo secco)’이고, 다른 하나는 큰 관현악 앙상블로 반주되는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recitativo accompagnato)’이다. 이것은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표준적 요소가 되었다.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60~1725)는 나폴리 오페라를 정상에 올려놓은 작곡가이다.
바로크 말기가 되면 오페라는 완전히 솔리스트가 장악한 형태가 되어 버린다. 유명한 독창가수들은 혼자서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껏 기교를 부리고 나서야 무대에서 퇴장했고, 따라서 그 외의 오페라 요소들은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또한 이탈리아 바로크 말기는 카스트라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카스트라토는 원래 바로크 초기에 몬테베르디가 극적 상황을 강화하기 위해 남자를 소프라노로 기용한 것이었는데, 바로크 말기에 이르러 엄청난 부와 명예, 인기를 누렸다. 강력하고 매끄러운 소리와 빠른 운동성이 절묘하게 결합해서 일류 카스트라토가 출연하는 오페라는 만원을 이루었다. 더군다나 로마에서는 여성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모든 여성 역할을 카스트라토가 도맡아 했다.
18세기 초 나폴리는 인테르메조(intermezzo)라는 희극적 막간극과 오페라 부파(opera buffa)의 중심지였다. 인테르메조는 본격 오페라의 막간에 끼워 넣는 두 명의 등장인물로 이루어진 짧은 희극적 작품이었던 반면, 오페라 부파는 6~10명의 배역에 레시터티브, 아리아, 중창 등의 구성을 갖는 독립적인 공연 형태를 갖는다. 오페라 부파는 일반적으로 희극적 인물과 평범한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주제로 다루었으며, 이러한 희극 오페라의 전통은 18세기에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전파되었다.

나. 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의 바로크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면서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절대 왕권의 장중하고 화려함을 느끼게 하는 프랑스 오페라는 절대 왕권의 쇠퇴와 함께, 귀족들이나 중산층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오페라 발레 시대를 맞게 된다. 또한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시민 의식은 귀족적 우아함을 비판하며 서민적인 오페라 코믹을 생겨나게 한다.
프랑스의 귀족적이며 우아함을 이어가던 흐름은 심각하지 않으며 장식적인 화려함을 선호하게 되는데, 이러한 프랑스 바로크 말기의 문화를 로코코라고 한다. 로코코 양식 음악은 귀족들의 권태로움을 달래는 장식적인 기능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관념적이고 무거운 바로크적 특성을 타파하는 역할도 했다. 따라서 로코코 양식은 고전주의로 진입하기 위한 전(前) 고전주의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1) 프랑스 오페라와 오페라 발레
바로크 전체를 통해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주도권을 잡으며 각지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특히 이탈리아가 카스트라토를 기용하는 것을 악취미로 보았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문화인 발레와 발레 음악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가 프랑스의 전통 발레를 오페라와 접합시켰는데, 이탈리아 오페라를 다소 변형시켜 3막 오페라의 중간중간에 장중한 발레 장면을 삽입하여 5막의 프랑스식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163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난 륄리는 프랑스 궁중에 시종으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고, 후에 무용과 바이올린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작곡가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프랑스 어의 특성을 잘 살린 레시터티브를 고안해 냈고, 가락을 다양화하여 자유로운 걸음걸이를 가능하게 했다. 기악 면에서는 ‘프랑스식 서곡’을 사용하였다. 이 서곡은 두 부분이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점 리듬을 지닌 느리고 장중한 도입부와 푸가풍의 빠른 악장, 그리고 느린 템포의 악장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특징이다. 륄리의 오페라는 화려하고 장엄하며 변화가 심했다. 그리고 국왕을 찬양하는 관례적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태양왕’루이 14세 당시의 영화로움을 그대로 반영했다.
1687년 륄리가 세상을 떠나고 늙은 국왕 루이 14세는 종교에 몰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화려했던 음악과 춤은 베르사유 궁중을 떠나 귀족이나 중산 계급의 저택으로 옮겨 갔다. 사람들은 호화롭고 웅장한 것에 싫증을 내고, 대신 귀엽고 경쾌한 것을 좋아하게 되어 오페라 발레가 탄생하게 되었다. 오페라 발레는 오페라와 달리 줄거리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보다는 얼마나 장식적 요소가 있는가를 더 중요시했다.
  (2) 부퐁 논쟁(La Guerre des Bouffons;륄리와 라모 등 프랑스 궁정 오페라에 대한 지지 세력과, 이탈리아 풍의 오페라 부파(희가극, 코믹 오페라)를 좋아하는 편이 맞붙은 이 논쟁은 결국 왕당파와 신흥 중산층 출신 지식인의 대립과 갈등)과 오페라 코믹의 탄생
장 필립 라모(Jean Philippe Rameau; 1683~1764)는 나이가 쉰 살이 되었을 때 첫 번째 오페라를 작곡했다. 라모의 작품들은 륄리를 계승하던 정통파 음악가들보다는 매우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선율을 지향하고, 화성적으로 풍부한 작품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에, 계몽 사상가이며 서민적 오페라를 지지한 장 자크 루소에 의해 비판받으며 부퐁 논쟁에 휘말렸다.
부퐁 논쟁은 1752년 파리에 있던 몇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상연한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발랄함과 단순함에 매료되었고, 라모의 작품을 위시한 프랑스 오페라를 철저히 비판하기 시작했다.
부퐁 논쟁은 오페라 코미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페라 코미크는 상당히 서민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일상생활이나 전원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다. 또한 희극적이며 풍자적이기도 했다.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은 보드빌(vaudeville)로서, 원래 잘 알려진 선율에다가 가사만 바꿔서 부르는 형태였다.
부퐁 논쟁 이후 프랑스의 세련됨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음악은 글루크에 의해 이어졌다. 바로크 초기에는 장중한 화려함을 중시했으나 말기에는 심각하지 않은 세련됨과 우아함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특히 궁중에 상주하는 현악 합주단의 프랑스 5성부 관현악법과 발레 음악의 부점 리듬은 프랑스적 음악을 구축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취향은 바로크 말기에 전고전주의의 문을 여는 로코코로 치닫게 했다. 즉 음악은 심각할 필요가 없고 향수 묻은 손수건처럼 사치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 로코코 음악은 당시의 건축물이나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많은 화려한 모습을 닮았다.`

다. 영국과 독일의 오페라
17세기 영국에서 발전한 오페라는 마스크(masque), 즉 대화, 노래, 춤, 기악곡들로 구성된 이전의 궁중 오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영국 오페라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이다.
독일에서는 오페라가 늦게 시작되었고, 17세기 후반에 독일 오페라단이 결성되기 전까지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만이 공연되었다. 1678년에야 독일 오페라단이 결성되어 독일 오페라가 창작되었는데, 이러한 독일 오페라를 징슈필(Singspiel)이라고 한다. 다른 오페라와는 달리 징슈필에서는 말로 하는 대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영국이나 독일에서는 오페라가 정착하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종교 개혁과 계속되는 왕정끼리의 싸움, 또한 금욕적 청교도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화려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기가 어려웠으며, 독일의 경우에도 종교 개혁의 물결로 독일적 음악극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4. 독일의 교회 음악
이탈리아 교황청의 지배 하에서 자국의 문화를 꽃피우지 못했던 독일은 바로크 초기부터는 정신적 독립성을 가지고 코랄을 바탕으로 한 독일적인 장중함을 형성해 나갔다.

 

가. 독일 루터 교회의 음악
종교 개혁의 수장인 루터는 종교 생활에 있어 음악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음악을 사랑했다. 때문에 루터파 교회의 음악은 장식적인 음형을 발전시켰고, 1700년에는 칸타타를 예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독일의 각 마을들은 저마다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이때 음악의 중심은 모든 마을이 소유하고 있던 오르간이었다. 오르간은 대위법적 음조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당시 즐겨 사용되었다. 루터파의 전통을 중시하여 독일적 음악의 발판을 닦은 세 사람은 슈츠, 샤인, 샤이트였다. 이들은 이후, 바로크 음악을 집대성했다 할 수 있는 위대한 작곡가인 바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작곡가들이다.
(1) 하인리히 슈츠
슈츠(Heinrich Schutz; 1585~1672)는 17세기 독일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이다. 유럽을 강타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독일식으로 소화시켜서 수난곡(passion)으로 작곡하였다. ‘부활제 오라토리오’라는 작품에서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을 수난곡으로 처리한 것이다. 슈츠의 ‘부활제 오라토리오’는 서술력과 작품 속의 사건에 대한 깊은 생각 때문에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으로, 1세기 후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또한 부활제용 음악으로는 처음으로 오르간에 의한 바소 콘티누오(통주저음) 반주를 사용했다.
(2) 요한 헤르만 샤인
샤인(Johann Hermann Schein; 1586~1630)은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작곡가로서의 재능이 모두 뛰어난 음악가였다. 그는 많은 교회곡, 세속곡, 기악곡을 남겼고 특히 그의 작품은 바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샤인의 작품 중에서 독일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새로운 소품집(Opella Nova)”이다. 이 곡집은 1618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묘사와 감정 표현에 탁월한 새로운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가능성을 철저히 연구한 뒤 루터파 교회의 코랄에 기초를 두고 만든 독일적 작품이다.
(3) 사무엘 샤이트
샤이트(Samuel Scheidt; 1587~1654)는 슈츠나 샤인처럼 이탈리아의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루터파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샤이트의 작품은 오르간 음향 배합에 대해 완벽한 지시를 주고 있다는 점과, 페달의 광범위한 응용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5. 바로크 시대의 기악 음악
이탈리아의 기악 음악은 종래의 성악 양식에 의한 기법을 완전히 청산하고 독자적인 기악 이념을 추구하여 다양한 기악 형식을 확립해 갔다. 이에 따라 보다 큰 기악곡 형식을 구축하기 위한 형성 원리로 다악장의 형식이 나타났다. 각각 개별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지닌 악곡인 악장(樂章)을 통일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보다 큰 하나의 형식을 형성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새로운 악기들이 많이 개발되거나 개량되어 활용되었다. 북이탈리아에서 개발된 바이올린은 넓은 음역과 다양한 음역으로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여 바로크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악기로 등극하였다. 오르간은 풍부한 음향과 대위법적 기교에 부합하여 지속적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도 많이 사용된 건반 악기였다.

가. 모음곡
바로크의 ‘모음곡(suite)’은 여러 개의 춤곡을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다. 국가 간 음악가의 이동이 흔했고, 국적이 다양한 춤곡들을 한 벌로 모아 춤 반주뿐만 아니라 연주나 감상용으로까지 양식화된 작품이 쓰이게 되었다. 각 곡의 특징적 양식은 프랑스에서 확립되었지만, 춤곡들을 모아 ‘모음곡’이라는 하나의 음악적 조직으로 확립한 사람은 독일의 작곡가 샤인(J. H. Shein)으로서 그는 1617년에 모음곡 20개를 구성하여 출판하였다.
17세기 중엽에 클라비어를 위한 모음곡이 독일에서 대중화되었으며, 바로크 후기에는 음악 양식적으로 정형화되었다. 첫째 악장 ‘알망드-(allemande)’는 독일 춤으로 보통 빠르기의 2박 계통 곡인데 음계적 음형을 갖는다. 둘째 악장 ‘쿠랑트(courante)’는 프랑스 춤곡인데 보통 빠르기의 3/2 또는 6/4박자로 프랑스풍의 당김음과 대위적인 짜임새가 특징이다. 셋째 악장 ‘사라반드(sarabande)’는 스페인 춤으로 3박 계통의 느린 곡이며, 위엄이 있고 화성적이다. 마지막 악장 ‘지그(gigue)’는 영국의 춤곡으로 6/8 또는 9/8 박의 가볍고 빠른 리듬의 곡이다. 모음곡의 이러한 정형화와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작곡가는 독일의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1616~1667)이다.
프랑스의 모음곡은 류트나 클라브생(clavecin)을 위해 작곡되었다. 프랑소와 쿠프랭(François Couperin; 1668~1733)은 장식음(agrément; 아그레망)을 세심하게 기보하여 장식음 체계를 표준화하였다.

 

나. 소나타
소나타는 ‘악기를 연주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 어 동사 ‘son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처음에는 성악곡인 칸타타(cantata)와 구분하기 위해서 기악 연주곡을 소나타라고 불렀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다성적 성악곡인 칸초나를 기악화한 것을 ‘칸초나 다 소나레(canzona da sonare)’라고 하다가 ‘소나타’라고 일컫게 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쓰이게 된 소나타라는 이름은 다양한 형식의 악곡을 일컫는 데 쓰였다. 즉 단순한 노래를 기악곡으로 바꾼, 넓은 의미에서의 소나타가 작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법에 있어서도 성악의 모노디 형식을 가진 기악곡 등, 소나타는 악기로 연주하는 것 외에는 성악곡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17세기 후반, 중기 바로크에 이르면 소나타는 거의 모두 기악곡이 된다. 형태로 나누어 보자면 크게 교회 소나타와 실내(궁중) 소나타의 두 종류로 정형화된다. 교회 소나타는 일반적으로 ‘느림-빠름-느림-빠름’의 4악장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장중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제1악장은 짝수 박자로서 특히 장중하고, 제2악장은 푸가, 제3악장은 홀수 박자의 화성적 서법, 제4악장은 춤곡풍의 리듬을 지닌 것이 많다. 실내 소나타는 대조적인 춤곡을 몇 개 배열한 일종의 모음곡인데 알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지그, 가보트 등이 즐겨 쓰였다. 이 두 형태의 소나타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중기 바로크의 소나타를 형식면과 내용면에서 완성한 것은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였다.
악기 편성상으로 보면, 바로크의 소나타는 트리오(3성부) 소나타와 솔로(독주) 소나타로 나눌 수 있다. 통주저음 위에 트리오 소나타는 2개 성부를, 솔로 소나타는 1개 성부를 가지며, 선율 악기는 거의가 바이올린이고 트럼펫이나 플루트 등이 드물게 쓰였다.
바로크 말기로 가면서는 솔로 소나타가 중요시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주법이 성악과 구별되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 소나타와 궁중(실내) 소나타의 구별은 점차로 모호해지고, 두 형태를 혼합한 3~4악장의 소나타들이 많아졌다.
17세기 중엽부터 소나타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 퍼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알비노니, 비발디, 타르티니, 독일에서는 푹스, 텔레만, 헨델, 바흐, 영국에서는 퍼셀, 프랑스는 쿠프랭 등이 소나타를 만들었고 발전시켰다.

 

다. 푸가
푸가(fuga)는 모방 대위적 형식으로 17세기 말의 리체르카레를 대치한 것이다. 푸가는 장단조 체계가 확립되고 나서 완성되었다. 푸가의 기본은 주제(subject)라는 선율이며, 이 선율이 한 성부에서 제시되고, 이어서 다른 성부들이 그것을 딸림조나 으뜸조로 모방하여 제시한다.

 

라. 토카타
토카타(toccata)는 즉흥 양식을 일컫는다. 토카타는 주로 건반 악기, 특히 오르간을 위한 장르로 정착된다. 이 악곡은 연주가의 기량을 드러내는 데 적합한데, 불규칙한 리듬, 뚜렷한 대비, 음계형 악구의 화려한 연주가 특징이다. 토카타는 푸가 양식을 포함하여 프렐류드(전주곡)로도 불렸다.
독일 뤼벡의 오르간 주자였던 북스테후데(Dietrich Buxtehude)는 많은 전주곡을 남겼다.

 

마. 협주곡
협주곡(concerto)은 바로크 시대에 생겨난 대표적인 형식이다. 콘체르토의 어원은 ‘싸우다’, ‘경합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concertare’로서, 협주곡은 두 개의 음향체 간의 대립과 경합을 특징으로 한 악곡을 말한다. 바로크 예술이 지닌 원근감과 대비성을 음악에서는 협주 양식에서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바로크 음악의 선구자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성악 콘체르토는 점차 성악과 성악의 대비를 넘어서서 성악과 기악의 대비로도 나타나게 되었으며, 바로크 중기로 넘어가면서 바로크 특유의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 큰 콘체르토)로 발전했다. 코렐리는 기악곡에서 솔로 그룹인 콘체르티노(concertino)와 합주 그룹인 리피에노(ripieno; 가득 찬)가 대응되어 소리를 만들도록 하였고, 두 그룹 모두가 연주하는 것을 투티(tutti; 합주)라고 하였다. 바로크 말기에 이르러서 솔로 콘체르토가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이를 발전시킨 작곡가는 토렐리(Giuseppe Torelli;1658~1709)이다. 그는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협주곡(solo concerto)을 만들었는데, 좀 더 대위적으로 처리하여 독주 악기의 음악과 구별시켰다. 그는 3악장의 협주곡 형태를 쓰기 시작하였다. 

 

6.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바로크 초기에 유절 형식의 모노디 아리아였던 칸타타는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악장 형태의 성악곡이 되었고,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와 함께 바로크의 3대 성악 장르를 형성하게 되었다. 칸타타는 오페라와 달리 무대 장치나 의상없이 실내에서 소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연주하였다. 17세기 말엽에 작곡된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의 600여 곡은 칸타타의 절정이라 하겠다.
이탈리아 가톨릭 교회에서 독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 개혁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혁신 운동은 ‘영적 훈련’을 위한 기도 모임이었다. 이들은 수도원이나 교회의 오라토리오(oratorio; 기도실)에서 모였고, 이 기도 예배에서 청중의 교화를 목표로 한 종교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이것은 오라토리오라는 명칭이 주어지면서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하였는데, 오라토리오의 가사는 성서 구절에 창작된 시가 추가된 형태이고, 음악은 오페라와 같은 극적 성악 장르이다.

7. 세기말 귀족들의 문화 로코코
18세기 후반, 루이 16세가 국왕으로 있던 프랑스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귀족 정치의 말기적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예술과 문학의 영역에서도 한 세기의 종말을 알리는 듯 엄청난 변화가 휘몰아쳤다.
당시 프랑스의 예술 작품들은 귀족들의 허영심과 화려한 영화(榮華)의 마지막을 드러내는 듯, 극히 가벼우면서도 장식적이고 자기만족에 도취될 수 있는 것들이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을 일컬어 ‘로코코(rococo)’시대의 예술이라고 한다. 로코코풍의 예술은 주로 프랑스의 바로크 말기와 연결된 육감적이고 장식적이며 현란한 예술의 시대를 이르는 말이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로코코 음악의 악기로는 클라브생과 류트가 효과적으로 쓰였다. 이 악기들의 공통점은 줄을 손으로 뜯어서 소리를 낸다는 것인데, 소리를 한 번 내면 끊기기 때문에 그 음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연결 고리들을 장식음으로 만들어 넣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로코코적 정서에 두 악기의 장식적 요소가 잘 맞게 되었다.

클라브생과 류트.jpg

<Vivaldi, Largo from Concerto for Lute in D Major>

 

이 시기에 클라브생 음악을 가장 많이 작곡한 사람 중의 하나가 쿠프랭(F.Couperin; 1668~1733)이다. 그가 작곡한 클라브생 음악의 대부분은 귀족을 위한 궁중 춤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는 궁중 춤곡을 단순히 귀족들의 오락거리로만 여기지 않고 예술의 경지까지 올려놓았기 때문에 음악사에 남게 되었다.
류트의 작곡가로는 고티에(Denys Gaultier; 1603?~1672)가 유명했다. 고티에는 류트의 줄을 한꺼번에 긁어내려서 극적으로 화음이 넘치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불협화음 겹침선을 즐기는 등 즉흥적이고 다채로운 꾸밈음을 사용하였다. 류트는 작은 공간에서도 교감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류트가 로코코 시대에 각광받게 된 배후에는 프랑스 사교계의 ‘프레시외(precieux; 멋부리다)’가 있다.
로코코풍의 예술은 귀족들의 권태로움을 달래는 장식적인 기능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관념적이고 무거운 바로크적 특성을 타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로코코 양식은 고전주의로 진입하기 위한 전(前) 고전주의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대변하던 로코코 양식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일반 대중의 자연스러움을 대변하는 쪽으로 전이되어 발전하게 된다.

8. 주요 음악가
후기 바로크 시대를 집대성한 4명의 작곡가는 비발디, 라모, 바흐와 헨델이다. 이 시기는 절대 군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작은 공국 또는 강력한 도시 국가까지 모두 예술 후원을 통해 세력과 부를 과시하는 경향을 드러냈으며, 이것은 음악가들의 절대적 후원 체계로 작용하였다. 경쟁력 있는 작곡가는 더 나은 보수를 위해 자리를 옮기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과 기법으로 자신을 무장했으며, 작곡가들은 주문에 따라 구체적인 목적에 맞추어 작곡을 했다.

 

가. 안토니오 비발디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는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그는 어려서 사제 교육을 받았으나 건강이 나빠져서 미사 집전이 어렵게 되어 전적으로 음악에 헌신하게 되었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고아와 사생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피에타 오스페달레(Ospedale della Pieta)의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 교사로서 15년간 일하였다. 그는 운영 자금을 위한 자선 음악회 때마다 많은 분량의 작품을 작곡하고 직접 지휘도 하였다.
비발디는 협주곡에 탁월한 성과를 보였는데, 500여 곡의 협주곡 중 절반이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것이다. 그는 3악장 구조의 느린 악장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으며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림처럼 생생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또한, 비발디의 16개에 달하는 신포니아(sinfonia)는 고전 교향곡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나. 장 필립 라모
라모(Jean Philippe Rameau; 1683~1764)는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이다. 그는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웠고, 여러 도시에서 건반 악기 주자로 활동하고 작곡하였다. 라모는 30여 편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60여 곡의 건반 음악과 모테트 등을 남겼다.
음악 이론가로서 라모는 중요한 학술적 저술을 남겼는데, 그는 화성이 모든 음악의 근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화성 원리를 음향학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하였으며, 음을 5도씩 쌓아 온음계를 얻는 과정을 제시하고 배음열에서 장3화음을 유도해 내었다.
또한 화음을 3도씩 아래에서 위로 쌓음으로서 3화음, 7화음, 9화음으로 확장시킬 수 있고, 한 화음의 본질적인 성격은 자리바꿈 형태에서도 변하지 않으며, 근음 진행이 화성 연결에서 중요하다는 등의 ‘기능 화성 이론’을 확립하였다. 1722년에 출판된 “화성론”은 자신의 이론을 피력한 저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
오페라에 있어서 라모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서곡과 춤 반주곡, 그리고 무대의 사건을 묘사한 관현악곡 등에 나타난다. 이 모든 개성적 요소들은 화성 이론가로서의 라모의 생각이 작품에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을 창조한 작곡가 중 하나로 존경받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중부 독일 루터파의 중심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삼촌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자랐다.
바흐는 1700년 봄, 북부 독일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루터파 교육을 받고, 교회 합창 단원으로 활동하며 북부 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 음악과 친숙해졌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중부 독일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되었다. 그는 낮에는 성가대를 훈련시키고 교회의 학생들을 관리하면서도, 밤에는 과거와 당시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하고 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바흐는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 시절에 궂은 일을 하면서도 ‘토카타와 푸가 d단조’와 같은 위대한 작품을 작곡했다.
1707년 바흐는 그의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일곱 자녀 가운데 빌헬름 프리데만과 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이마르로 가서 궁중 예배장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이 기간에 오르간 연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이마르 시절의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그리고 ‘코랄 전주곡’ 같은 오르간 작품이며, 이 시기를 오르간 곡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바흐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괴텐의 궁중 악단을 이끌게 되면서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괴텐 궁중 악단 시절에 그는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등을 작곡했는데, 이러한 밝은 빛으로 충만한 듯한 작품들은 바흐의 사회적·가정적 행복감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이 아내로 맞이했다. 바흐는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곡집’을,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 ‘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하였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 합창장(Cantor)으로 취임하는데, 이 시기를 ‘바흐의 교회 음악의 시대’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를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 ‘마태 수난곡’등 많은 교회 음악을 작곡했다.
바흐는 만년에는 대위법 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예술’등도 작곡하였다.

 

라. 조지 프리데릭 헨델
바로크 말기에 바흐와 같은 해에 태어난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은 독일 출생의 영국 작곡가이다. 할레에서 태어난 그는 9살부터 오르간을 배웠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로마의 코렐리, 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서 실내악을 작곡했으며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에 휴가를 얻어 런던을 방문했다가 1712년 이후부터는 런던을 중심으로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하였다. 1719년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였으며, 그 이후 약 10년 동안 창작의 전성기에 들어선 헨델은 오페라 ‘라다미스토 (Radamisto)’,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등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728년부터 약 10년 동안은 중산 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 계급이 궁중적이고 귀족적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반발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서 헨델의 입지는 매우 약해졌다.
1737년, 헨델은 건강 악화와 경제 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1741년에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정수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라 할 수 있다.
‘메시아’ 이후에도 헨델은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는데, 1751년 오라토리오 ‘예프타(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헨델은 오페라(46작품), 오라토리오(32작품)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했지만, 기악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 모음곡 ‘수상 음악 모음곡(Water Music Suite)’, ‘왕궁의 불꽃놀이(Royal Fireworks Music)’외에, 합주 협주곡 여섯 곡, 오르간 협주곡, 트리오 소나타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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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 벨리니(Bellini)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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